존재양식으로 살기와 대화의 기술

내가 이해하기로 존재양식으로 산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들이 내가 소유하는 것들 중에 하나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나로부터 나오는 것은 내 존재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 읽기전과 같은 존재가 아니어야 책을 올바로 받아들인 것 처럼, 무엇인가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 가운데 나는 메모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은 내가 단지 알고 있는 사실이라기 보단, 내 존재가 발산하는 내 자신의 일부이어야 한다.

보통 얘기하는 대화의 기술 – 특별히 논쟁의 경우 -중 하나가 자신의 주장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어떤 의견에 대한 반대일 뿐이지 나를 – 특히 나의 자존심을 – 해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자신의 주장과 자신을 분리함으로서 자신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나란 존재의 옳고 그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이전 주장을 믿지 않게 된것을 새로이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주장 – 존재양식으로 사는 것과 논쟁의 기술 – 이 미묘하게 서로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존재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그 의견이 자기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부정되는 것이 어떻게 보아도 현재 존재에 언짢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과 자신의 의견을 분리하는 것은 소유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닐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2장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의 예 중에 대화편에 보면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은 자신들이 소유한 의견을 잃음으로서 가난해지지 않기 위함이라고 쓰여있다. 그렇지만 좀 더 영리하게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논쟁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소유물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그 소유물(의견)은 어떻게 부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

me2day

잠시전에 초대장 얻어서 가입한 미투데이, 첫인상이 몹시 실망스럽다.
가입 화면 먹통되고 다시 쓰고.
글을 써도 써지는 듯 없어지고 10분도 안 되어 internal server error를 네다섯번 봤다.
아 정말 뭐냐 이거..

gmail이후 서비스를 전격 공개하지 않고
암암리에 사람을 다단계마냥 끌어모아 차근차근 덩치를 불려가는 것이 요즘 유행이라지만,
이용자가 좀 늘었다고 이렇게 버버버벅거린다면 뭐랄까 참 쑥스러운 일이다.

내가 회사일을 시작하면서 선배/상사들로 부터 늘 듣던 소리가
대국민을 상대로 24/7 서비스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 무렵은 기술력의 척도가 동시에 몇명을 감당하는가 였던만큼
이런일은 거의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웹2.0 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재미난 것들이 막 생기는 요즘
2000년 전후 벤처 열풍이 휘몰아치던 그 때
턱도 없는 아이디어가 사람들을 휘두르려던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 생겨나는 것들 중에도 남을 것은 남고 없어질 것은 없어지겠지.
그 남기위한 필요조건중 하나가 일단 사람이 몰려도 어느정도 돌아가는 거인데.

안경 사진기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기에 찍히는 화면을 보면 꽤 다르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만든 네모를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나오겠지 짐작하기도 한다.
내가 요즘 쓰고 다니는 안경은 테가 꽤 두껍고 네모난 모양이라
살짝 앞으로 내밀면 손가락 네모 대신 쓰일만 하다.
안경처럼 눈에 쓰고 다니다가 그대로 보이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사진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쓰고 다니다가 찰칵. 눈에 보이는 대로 찰칵.

혹 누군가 이미 생각하고서 이런걸 잘 만들어 세상에 내놓게 되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노라고 떠올리게 될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경 사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