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하기로 존재양식으로 산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들이 내가 소유하는 것들 중에 하나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나로부터 나오는 것은 내 존재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 읽기전과 같은 존재가 아니어야 책을 올바로 받아들인 것 처럼, 무엇인가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 가운데 나는 메모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은 내가 단지 알고 있는 사실이라기 보단, 내 존재가 발산하는 내 자신의 일부이어야 한다.
보통 얘기하는 대화의 기술 – 특별히 논쟁의 경우 -중 하나가 자신의 주장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어떤 의견에 대한 반대일 뿐이지 나를 – 특히 나의 자존심을 – 해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자신의 주장과 자신을 분리함으로서 자신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나란 존재의 옳고 그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이전 주장을 믿지 않게 된것을 새로이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주장 – 존재양식으로 사는 것과 논쟁의 기술 – 이 미묘하게 서로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존재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그 의견이 자기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부정되는 것이 어떻게 보아도 현재 존재에 언짢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과 자신의 의견을 분리하는 것은 소유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닐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2장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의 예 중에 대화편에 보면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은 자신들이 소유한 의견을 잃음으로서 가난해지지 않기 위함이라고 쓰여있다. 그렇지만 좀 더 영리하게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논쟁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소유물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그 소유물(의견)은 어떻게 부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