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앤드류아저씨랑 잠시 떠들다 생각한 바,
경제활동에서 인간은 소비 주체(=시장)와 생산 도구로 여겨진다.
경제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질 수록 그 다루는 거시적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커진다.
예를들어 회사가 어려워서 인원 감축하게 될 때, 실업으로 고통을 겪을 가정에 대한 배려는 기대하기 힘들다.
인간관계를 자원으로서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왜냐면, 누구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가며 살 수 없기 때문에, 관계에 의지하며 산다.
나는 누군가를 이용하고 누군가는 나를 이용한다.
경제적인 논리로 인간관계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
평소에 면식을 늘리는 것은 투자 행위이고, 도움을 얻는 것은 그 투자에 대한 결실이다.
적은 투자로 많은 결실을 얻고자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해를 하면서 기분이 나쁜가?
가능한 한 가지 이유는 나는 그렇게 너를 보지 않았는데, 너는 나를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서 뭔가를 얻기위해서 투자한 것만은 아닌데, 너는 그런가 보구나.
나는 너랑 있으면 이용당하는 것만 같구나. 너는 되로 주고 말로 챙기는구나.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챙길 뿐, 내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구나.
쉽게 말하면 이 관계에서 내가 얻는 만족은 작고 네가 얻는 만족은 커 보이는 구나.
아주 기계적인 논리에 의하면, 그런 경우 나는 그 기분 나쁨을 너의 명성(=사회적 가치)에
대한 비난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게 불이익을 주도록 유도함으로서
너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다. 치사하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다. 대게 그렇게 한다.
신앙에 의지하는 경우, 전쟁은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 하나님으로 하여금 대신
처벌 하기를 맘속으로 기원할 수도 있다. 스스로, 혹은 내막을 아는 사람은 나를 좀 더
고매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내 손해 만큼 니가 당하기를 바라는 점은 매한가지.
이렇게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인간관계는 아주 피곤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여행길에 있는 나그네로, 목적지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옆자리에, 걷다가 주저앉은 벤치에서 만나는 이들이 있다.
심심한 여행길에 말동무하다가 어짜피 헤어질 것이지만
사람사는게 그런게 아니니 두런 두런 사귀고, 도시락도 나눠먹고 한다.
그러나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나 급하게 갈길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이랑은 그냥 스쳐 지나갈 뿐.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듯이. 너는 네 갈길을 가라. 그렇게 살다 가라. 어여 가라.